박지영 민들레지역사회의료센터장
안녕하세요. 동네의사 야옹선생 박지영입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택배 상하차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분이 회사에서 혈압을 측정했는데 높게 나왔다며 혈압이 괜찮다는 소견서를 작성해달라고 찾아 왔습니다. 종종 있는 일이라 혈압을 체크하고 소견서를 써드리려고 하는데, 이분이 좀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회사에서 혈압이 정상이라는 것과 야간근무가 10시간 이상 가능하다는 내용을 써오라고 했어요."
이런 요구는 처음인지라 다른 선생님들과 상의하여 혈압만 가지고는 그런 내용으로 소견서 작성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그냥 좀 써주시면 안되나요? 제가 돈이 없어서 일을 꼭 해야 되거든요."
그분이 회사에서 받았다며 메시지를 보여주시는데, 소견서에 혈압 관련 진료를 받고 당일 측정 혈압 뿐 아니라 24시간 혈압 측정 결과지를 포함시키라고 되어있습니다. 찬찬히 전후 사정을 여쭤보니 평소 혈압이 높은 분이 아니고 커피를 마시고 한번 혈압이 높았는데 이런 소견서 작성을 해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박지영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못하니 검사가 가능한 다른 곳을 알아보시라고 했을텐데 이전 기록을 확인하던 중 이분이 장애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이분의 편에 서야겠구나.'
환자의 양해를 얻어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분이 오늘 혈압이 반복해서 정상으로 측정되었고, 이전 진료기록에도 정상 혈압으로 측정되었는데, 이것만 가지고 소견서를 써 드리면 안 될까요? 꼭 24시간 혈압 측정을 해야 한다면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을 해주시나요?"
당연히 모두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회사 정규직도 아니고, 이분을 뽑지 않더라도 회사에서 손해볼 일 없는데다, 고혈압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곤란한 것은 회사가 될 테니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이분이 장애인인 것을 안 이상, 그리고 제가 장애인 주치의로 일을 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이분의 편에 설 사람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적어도 같이 고민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은 편에서 목소리를 내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직업환경의학과 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드리고 어찌해야할지 여쭤보니 이렇게 답변을 주십니다.
"요사이 택배 물류센터에서 사망 사고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야간작업에 대한 특수검진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직업환경의가 있는 곳에서 진료를 받으시고 업무 적합성 평가를 받도록 해주십시오."
결국 근처 직업환경의가 있는 병원을 수소문하여 의뢰를 하였고 혈압이 약간 높은 것으로 나와 고혈압 치료도 시작하였습니다.
그분께 장애인 주치의 사업을 소개하고 등록을 권유하니 이렇게 묻습니다.
"그거 하면 무얼 해주나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주치의가 되는 겁니다. 당신이 더 건강해지도록 친구가 되고, 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분은 이제 제 환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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